'피골이 상접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에 투영된 독립투쟁사
1925년 이전과, 1932년, 그리고 1937년의 도산…. 세월을 달리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사진 3장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첫번째 사진은 일제강점기 대정 연간(1919~1926년)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 양식에 붙여놓은 것이다. 1919년 도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약할 당시의 자신만만한 안창호, 즉 시쳇말로 ‘리즈’ 시절의 사진을 여러 장 복사해서 붙인 것이리라. 1932년의 사진은 도산이 그 해 4월 29일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 날에 일제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수감되었을 때의 수형카드이다. 소화 12년(1937년) 7월 4일 촬영한, 깡마르고 다소 초췌하지만 나름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봐줄만 하다. 1937년 11월 10일 사진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된 도산이 모진 심문과 함께 혹독한 형무소 생활을 버텨내던 도산 선생의 모습이다. 너무도 늙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쌓인 연륜에 따라 당연히 주름이 패이고, 머리카락도 빠졌겠거니 하고 애써 생각해본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석장의 사진을 비교하면 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함께 체포된 장이욱(1895~1983)이 바라본 도산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도산은 1938년 3월10일 0시 5분 서거했다. 일제는 도산의 서거가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했다.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말 것과, 장례식 주관 및 참석자는 가족 친지 등 몇 명에 한하고, 고별식에도 이들 이외는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반인의 조문이 금지되었으며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됐다.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들의 언행을 사찰했다.
도산의 유해는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망우리로 향하는 출입로에는 ‘불온언동자’를 색출하고‘소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영구차 앞뒤로는 경찰 자동차가 경계를 폈으며 경관들은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하여망우리로 향하는 길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경계를 폈다. 당시 영구차가 묘지로 갈 때 망우리 방향 통행은 일절 금지됐다. 망우리에 도착한 도산의 관은 즉시 매장됐다. 묘지에 심으려고 가지고 갔던 무궁화 묘목은 압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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